1. 다사다난했던 알제리 출장이 마무리되고 있다. 이 시간을 나중에 어떻게 기억할까? 체력의 한계를 경험한 시간이었다. 힘에 부쳐 12시간씩 쓰러져 잤고, 토할만큼 통역하고 번역했다. 다시는 이렇게 일하고 싶지 않다. 마음 맞는 이가 이 과정을 함께 해주는게 얼마나 심적 안정이 되는건지도 느꼈다. 동기사랑 나라사랑입니다. 동기없이 혼자 들어오는 대형 프로젝트는 고달픔이 배가 됩니다. 그리하여 내년도 목표는 체력 증진으로 설정했다. 올한해 지독하리만치 운동을 못했다. 골병이 들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운동을 중단하고, 운동을 못하니 그나마 쌓아둔 체력을 깎아먹는 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어제부터 스트레칭을 다시 시작했는데, 오늘 허벅지 안쪽 근육이 툭- 하고 끊어지더니 지금 왼쪽 엉덩이까지 아프다 ㅋㅋㅋ..
넷플릭스로 시즌3를 보는 중에 별거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엘사와 더그의 대화 중에서 더그가 예전의 우리가 어쩌다 지금 별거를 이야기하는 우리가 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랬던 과거의 나'가 '저런 지금의 나'가 되는 사이에는 다 흐름과 굴곡이 있지만, 그 가운데를 쏙 뺀 채 '과거의 A'와 '현재의 B'만 놓고 보면 둘 다 나인데도 억만년 은하를 건너 온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과 맞물려 - 프랑스어를 하기 이전의 나 vs. 지금 알제리 호텔방에 앉아 있는 나 - 첫사랑이 끝사랑일 줄 알았던 고등학생 나 vs. n번의 연애를 거쳐온 지금의 나 두 개의 자아는 연속성만 있다 뿐이지 분절된 상태로 단면만 보면 다른 나이다. 그리고 위의 두 구분은..
추석 연휴부터 꼬박 한 달 동안 휘몰아치는 일정이 다 끝났다. 주말, 공휴일 할 것 없이 마음 편히 쉬어본 적 하루도 없는 나날이었다. 이제 다음주 알제리 출장갈 준비만 하면 된다. 비자받은 여권 수령, 환전, 알제리 싸들고 갈 식량 구입, 짐싸기 등. 중간중간 출장 관련 번역을 조금 하고, 메일링 하고, 출판사에 교정지 넘기고(추석 전날 받았는데 한 달 동안 쳐다도 못봄;;;), 이사간 집 정리하고(가스 연결, 벌레퇴치, 방충망, 하수구 트랩 등), 공인인증서 연장 및 새 신용카드 수령해서 자동이체 다 그쪽으로 넘기기.. 정도 하면 출장 준비 끝인가? 올해 네 번째 출장인데 세어보니 이번 출장을 다녀오면 올 한 해 거의 5개월을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셈이고, 365일 중 열흘 이상을 공항과 비행기 안에..
1. 태어나서 처음 적도 아래 남반구에 와있다. 보통은 호주나 뉴질랜드를 떠올리겠고, 서른살 이전에 남미여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대학생 시절의 나도 내 첫 남반구가 킨샤사일 줄은 몰랐다. 작년 DR콩고 사업 하나가 호되게 엎어지고, 이번 새로운 프로젝트 출장도 항공권 다 끊어놓고 출국 3일 전 한 번 엎어진 탓에 콩고 땅은 못 밟아보는건가 했는데 결국 왔다. 외국인, 특히 아시아인은 현지 운전수 없이는 걸어서 1-2분 거리도 못 걷게 하고, 차를 타도 문을 모두 잠그고 출발해야 하며 창문을 내리지 못하게 하는 곳. 수도 킨샤사가 이 정도이니 지방은 아예 엄두가 안 난다. 지난 5월부로 WHO가 에볼라 바이러스 위험 국가로 지정했지만 아직까지 킨샤사에는 의심 및 확진 확자가 안 나왔다. 의심 환자가 한 ..
목차를 펴면 오십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평범하기 그지 없는 이름이 주루룩 나열된 목차를 보고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첫 장을 열었다. 서울이 아닌 지방 도시의 대학병원을 거점 지역으로 그 주변을 지나가는 인물들의 일상, 찰나의 순간들, 때로는 긴 시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주 평범한 인물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 이런 점은 과 닮았다. 을 읽으면서 여자친구들을 만나면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소설로 읽기까지 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있었다. 은 그보다는 엽편 소설 분량의 아주 짧은 이야기다. 인물과 인물이 마주치고, 특정 글귀가, 특정 장소가, 특정 영화가 구슬 꿰듯 꿰어져 나가는데 그 알이 어떤 알이었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굳이 찾아보고 싶다면 앞장을 들춰본다. 그러면 그 인물이..
지금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건 오전에 클라이밍을 갔다가 샤워를 하고 나와서 연남살롱에 가서 소설을 읽으며 오후 한나절을 호젓하게 보내는 거다. 매번 마감이 끝나면 하고 싶은 일 to-do list를 적는데, 이번에는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만나야 할 사람 to-do list를 이미 작성해 놨다. 물론 만나고 싶은 사람들 이름이 적혀 있지만 어쩐지 일 같이 느껴진다. 출장 갔다 4월에 온 이후로 아직 한 번도 못 만난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건데, 작년 여름 내지는 가을에 만나고 안 본 사람들이 수두룩 빽빽이다. 그래서 지금 하고 싶은 건 전부 다 혼자 하는 호젓한 일들. 그리고 마음 편히 데이트다운 데이트하기... 그리고 해야 하는 일도 있다. 진짜 집 정리를 해야 한다_- 결국 이 집 살면서 이사짐 정리..
1. 서울에 온 지 한 달 반 가량이 되었다. 정신차리고 달력을 보니 5월 말일세. 봄이 끝나고 여름이 오는 이 계절을 사랑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없는 나라에서 지내다 오니 내가 얼마나 한 계절, 한 계절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더 크게 느낀다. 2. 애정하는 사람들과 술잔 기울이며 나누는 이야기들과 무대 공연이 그리웠다. 그래서 오자마자 국현무 안성수 감독의 을 보았고, 공연 첫째날에 보았더라면 이튿날 공연을 그 자리에서 예매해서 다시 보고 싶을만큼 좋았다. 공연 내내 열두 명의 무용수가 전부 단 한 번도 무대에서 떠나지 않고 숨쉬는 호흡마저 제어하는 흉통의 들쑥날쑥거림조차 아름다웠다. 공연 예술이 가지고 있는 생의 열기를 느끼고 싶어 무대 공연을 찾는데 그 에너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고 3년차 프리랜서 삶을 어찌어찌 이어가고 있는 나날이다. 당장 다다음달 뭐하며 살지 여전히 불투명한 나날이지만, 이건 10년차가 지나도 마찬가지라고 이미 1년차 때 이야기 들었으니 놀라울 일은 없다. 재미있는 통역 일을 하고 있는 주간이라 어제 4시간 정도 자고 오늘 오전, 오후 일정 꽉 채워서 뛰고 왔는데도 뭔가 뇌 속의 스위치 한 켠이 내려가지 않아 잠이 오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 뒤척이다가 이럴바에야 그냥 포스팅이나 하자 싶어 컴퓨터를 켰다. 내일도 아침 일찍부터 일정이 있지만 뭐, 어차피 이미 새벽 1시 반이다. 지나고나니 통대 2년 시절만큼 밀도 높은 시간이 내 인생에 있었던가. 이 시기는 마치 영유아 시기 같아서 이 시기가 지나면 더이상 뉴런이 확장되지 않는 것 마냥 절대..
십여년만에 파리를 방문했다. 출장 다니며 파리를 경유할 때 두어번 파리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비행기를 타느라 시내에 나가 지인을 만난 적도 있고, 저녁 식사를 한 적도 있긴 했지만 이렇게 며칠을 묵으며 여행자처럼 다닌 적은 처음이었다. 돈없던 학생 시절 힘들게 지냈던 프랑스가 아니라 돈 싸들고 돈 쓰러 가니 매우 재미있었다. 날씨가 조금 더 따뜻했으면 좋았으련만, 지내는 동안 하루 빼고는 날이 좀 흐린 편이라 아쉬웠다. 흐린 하늘도 매력적인 곳이긴 하지만. 따뜻한 곳에 있다 가서 그런지 유독 더 춥게 느껴지기도 했다. 프랑스, 독일 사는 지인들은 날씨 풀린거라고 따뜻하다고 하던데 나만 추워했다_- 1. Pho 14 - 129 Avenue de Choisy, 75013 Paris 2007년 파리에서 홈스..
프리랜서 3년차. 선택에 선택을 거듭하는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통대 졸업 후 프리랜서를 시작하기 전부터, 회사를 그만두고 통대 입시를 결정했을 때부터, 회사를 가기 전 다니던 대학원을 중도포기하기로 했을 때부터, 학부 졸업 시절 회사가 아닌 대학원을 가기로 했을 때부터, 이보다 더 이전 시간들에서도 늘 크고 작은 선택을 통해 여기까지 왔다. 멀쩡히 가던 길 되돌아가는 손해보는 선택도 여럿 했고, 인생을 바꿀만한 선택을 어찌 보면 별 고민 없이 서슴치 않고 한 때도 있었다. 위에 쓴 굵직굵직한 결정 뿐 아니라, 그 순간에는 선택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적 있는 무수히 많은 선택과 결정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하는 선택 하나하나가 이후의 나를 만들 거라는 걸 이만큼 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