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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고 3년차 프리랜서 삶을 어찌어찌 이어가고 있는 나날이다. 당장 다다음달 뭐하며 살지 여전히 불투명한 나날이지만, 이건 10년차가 지나도 마찬가지라고 이미 1년차 때 이야기 들었으니 놀라울 일은 없다. 

재미있는 통역 일을 하고 있는 주간이라 어제 4시간 정도 자고 오늘 오전, 오후 일정 꽉 채워서 뛰고 왔는데도 뭔가 뇌 속의 스위치 한 켠이 내려가지 않아 잠이 오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 뒤척이다가 이럴바에야 그냥 포스팅이나 하자 싶어 컴퓨터를 켰다. 내일도 아침 일찍부터 일정이 있지만 뭐, 어차피 이미 새벽 1시 반이다. 

 

지나고나니 통대 2년 시절만큼 밀도 높은 시간이 내 인생에 있었던가. 이 시기는 마치 영유아 시기 같아서 이 시기가 지나면 더이상 뉴런이 확장되지 않는 것 마냥 절대시기였다. 학교를 다니던 당시에도 이 시간이 얼마나 나중에 귀하게 여기질지, 잠 못 자서 힘들어 죽을 것 같던 이 시간마저 그리워하리라는 걸 느끼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저 시간의 중요성이 더 크게 느껴진다. 지나고나면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다. 평생 공부하며 살아야 하는 업이지만 통대 시절 같은 연속성과 몰입, 그때 같은 결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건 더이상 삶이 아니야... 통대 시절은 이미 지나갔고, 졸업 후 일하며 공부하는 시간은 다르게 쓰인다. 

그런 의미에서 지나고나니 아쉽더라 - 에 해당하는 내용은 이전에 한 번 언급한 적 있었던 것 같은데 나의 단점을 극복하는 시간으로 2년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것도 있다. 장점을 극대화하는 방향을 통대 입시부터 전략적으로 잡았어서 단점을 최대한 메우는 데에 상대적으로 덜 집중했던 것이 지금은 매우 아쉽다. 하지만 이건 당장 오늘부터 앞으로 내가 이 업에 종사하는 동안 개인적으로 메꿀 수 있는 부분이다. 위에 쓴 것처럼 통대 시절 같은 결로 메꿀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 된다. 

이 포스팅을 하려고 생각했던 건 다른 아쉬움 두 가지가 계속 크게 느껴지기 때문. 하나는 2년 동안 배운 것들을 전부 디지털 문서화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용어 정리는 그래도 비교적 착실하게 파일을 만들어서 한 편인데, 통대 시절 만든 용어정리 파일이 너무 거대해서 이걸 일하면서 바로 써먹기에는 좀 어려운 감이 있다. 그래도 일단 파일이 있으니 이걸 한 번 마음 먹고 지금 쓸 수 있는 형태로 변환시켜서 정리하는 작업을 하려면 할 수는 있다. 물론 하루만에 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다.

문서화에 대한 아쉬운 부분은 용어 정리보다 수업 때 했던 번역 과제들이 일단 가장 아쉽다. 2학년 1학기 때 운좋게 한불 번역 선생님이 1차 번역 과제 이후 2차 번역까지 제출을 시켜서 1,2차 번역 버전을 전부 한 파일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2학년 번역 수업은 과제물이 전부 파일로 정리가 되어 있고 일종의 최종 솔루션 버전(?)까지 문서화 해놓은 셈. 그런데 이것도 문제는 원문 문서가 없다. 종이로만 있고 파일이 없다. 원문까지 있으면 완벽한 평행 텍스트(통대에서 쓰는 용어로 한 주제에 대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톤으로 비슷한 세부 주제를 다루는 언어A와 언어B로 된 두 가지 문서를 비교해서 보는 것)가 있는건데! 게다가 다른 번역 과제물들은 대개 1차 번역본만 문서로 있고 거기에 대해 코멘트를 받거나 지적 사항 받은 내용들이 반영된 버전에 대한 문서가 없다. 1차 번역 과제물은 파일로 있어도 아무 짝에 쓸모가 없는 셈. 보통 번역 과제를 제출하고 나면 선생님이 프린트를 해서 거기에 코멘트를 적어주고 그 코멘트가 적힌 종이를 전부 가지고 있지만 이거는 들춰보는 법이 거의 없다. (딱 한 번 정관 번역을 할 때 너무 급해서 통대 사물함에서 빼온 수백, 수천장의 종이를 뒤져서 찾아낸 적이 있을 뿐.) 그런데 이미 정리된 나름 솔루션 버전의 번역 과제물이 의외로 굉장히 유용해서 자주 찾아보게 된다. 전형적으로 뻔한 문장 쓰는 번역의 경우 특히 심하고, 의외로 통역 준비하면서도 번역 과제물을 들춰보게 될 때가 있다. 정리된 문장,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문장이 이미 거기에 적혀 있으니까. 1학년 때부터 모든 번역 수업들을 이렇게 정리해두었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지만 용어 파일과 달리 이 작업은 디지털 문서화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 수많은 종이들을 일일이 들춰보며 완성된 버전으로 만들 시간과 에너지는 이미 없다. 하지만 그 종이들을 버리지도 못하고 끼고 안고 있다는 것이 함정... 

번역 과제물 뿐만 아니라 다른 통역 수업들, 주제 발표 등 여러 수업의 기록을 종이 노트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전부 DB로 만들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구체적인 방법은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지만 여기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다면 재학 시절 조금 더 고민해서 이런저런 방법들을 시도해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운좋게 2학년 1학기에라도 새로운 수업 방식을 도입해 준 한불 번역 선생님을 만난 것이 고마울 뿐이다. 

두번째 아쉬움은 내 전공 언어과가 아닌 다른 과와 네트워킹을 하지 못한 것. 같은 과 내에서 동기, 선후배들과 잘 지내야 한다는 생각은 입학 전부터 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좋은 관계들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다른 과 사람들과는 교류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졸업하고 나와서 일을 시작해보니 다른 과와 네트워킹의 필요성이 이렇게 간절할 수가 없다. 일단 내가 일하면서 만나는 고객이 다른 언어 통번역사를 찾을 때 내가 바로 가져다 줄 수 있는 컨택 포인트가 없어서 최소 한 다리 건너 우회해야 하며, 이 얘기인 즉슨 반대로 생각해보면 다른 언어를 하는 통번역사가 내 언어 서비스를 원하는 고객을 만날 때 나에게 일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년에 최소한 몇 번은 꼭 이런 일이 있더라고. 한 건 한 건이 아쉬운 마당에 한두 번이 아니라 이런 일이 쌓일 때마다 아쉬움이 크다. 졸업 이후에는 그 흔한 동문회 모임 같은 것도 없는 학교인지라 네트워킹 따위 기대할 수 없는 것이지. 우리 과 동기들이랑 송년회 개최하는 것도 힘든 현실이여 ㅋㅋㅋ

그래도 운 좋고 다양한 인원으로 구성된 동기들과 2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무지무지 행운이다. 좋은 선생님들에게 배운 것만큼이나 동기들이랑 같이 지내며 배운 것도 많았고 여전히 많다. 어떤 해에 입학해 어떤 사람들과 같이 공부할지는 순전히 자기 운인데 나는 비교적 운이 좋았다. 

 

일을 하나씩 할 때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꼭 스치고 지나간다. 그 생각들을 얼만큼 실현시켜 나갈 것인지가 올해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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