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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 이야기

김첨지. 2017. 7. 13. 03:01

오랜만에 통역 하고 왔더니 이 생각 저 생각이 많아 쉽사리 잠이 들지 않는 김에 블로깅. 


6월 내내 출판 번역 마무리 작업을 하느라 다른 일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5월 말 통역을 하고 한 달 반만에 다시 통역을 하려니 졸업하고 처음 통역 가던 그 날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게 떨렸다.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청소년 교류 행사라 비교적 가벼운 행사인데도 오랜만에 하려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 


지난 5월 말 행사와 이번 행사, 두 가지 모두 성격이 매우 다르지만 둘 다 곧이어 후속행사가 있다는 점이 공통점이었다. 그리고 둘 다 통역이 끝나고 다음 행사 통역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통역하고 나서 가장 기쁜 피드백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이켜보면 내 부족함은 내가 너무 잘 알지. 그렇기에 괴롭다. 

100% 완벽한 통역이란게 있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더 잘하고 싶은 마음만 크다. 늘 이보다 더 잘할 수 있는데 하는 아쉬움이 가득 남는다. 

하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 없지. 


나는 통대 가기 전 관련 경력도 하나도 없고, 소위 말하는 인맥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런 내가 통대 입학 직전 한 생각은 하나였다. "동기들과 잘 지내자. 나중에 이래저래 다 필드에서 만날 사람들이다." 

졸업하고 반 년 지난 지금 친한 동기 한 명이 인하우스에 들어간 덕에 자기한테 들어오는 일을 나에게 다 몰아주기도 했고, 다른 동기 한 명에게는 스케줄이 겹쳐서 못하는 코이카 연수 통역을 받아서 했다. 이 코이카 연수 통역이 졸업 후 첫 통역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주에는 다른 인하우스에 들어간 동기가 나를 프리랜서로 불러주었다. 

이만하면 지금까지는 통대 입학 시절 목표를 달성한 셈. 


인맥, 경력없는 나로서는 졸업하면서 한 다짐도 하나였다. "일이 들어왔을 때 잘하자. 그리고 클라이언트가 다시 찾는 사람이 되자." 

아직 후속 행사 건이 정식으로 진행된건 아니지만 모두 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니 준비 기간이 되면 찾아줄 거라는 작은 믿음이 있다. 


물론 이 동네에서 반 년 일하고보니 모든 건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기는 하다. 

행사 자체가 취소되고, 에이전시가 비딩에서 떨어지고, 별별 이유에서 나에게 왔다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건들이 확정되서 실제 일을 진행하는 건의 최소 1/3, 체감 1/2이다. 확정되어서 일을 진행하고도 입금까지의 기간이 또 남아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통역 건들은 대체로 착실하게 받은 편인데 동기들 얘기를 들어보면 통역도 몇 달 있다 받는 경우들도 종종 있는 것 같기도 하더라. 나는 대체로 번역 입금이 늦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돈 진짜 얼마 안되는데 보름 넘게 못 받은 돈 한 건 있음. 원래 예정 입금일이 작업 넘겨준 날과 한 달 반 훌쩍 넘는 기한 있는 곳이었다는 사실.) 


통대 다니면서 2년 동안 한 거라고는 크리틱 밖에 없지만, 단순 하나의 텍스트를 통역을 잘하고 못하고를 넘어서 프리랜서 시장에서 내가 가진 경쟁력에 대해 장점과 단점을 늘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좋게 말하면 자기 객관화가 잘 되는 편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 객관화만 잘되고 단점 보완을 위한 노력이 부족해서 혼자 괴로워하는 병에 걸린 사람이 바로 나. 

학교 다닐 때 한두번 들었는데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말이 요즘 너무 사무치게 마음에 와닿는데, 재학 중에 자신의 단점을 극복해야 한다는 이야기었다. 졸업하고 나면 그럴 시간 없다고. 졸업하면 시간 더 많은데 왜 없지? 라고 생각했었으나 왜 이런 이야기들이 있는지 어렴풋이 알겠다. 내가 가진 단점은 'B언어(모국어가 아닌 통역할 반대언어)', 즉 내 경우에는 프랑스어였기 때문에 2년 안에 극복하는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장점을 확대하는데 주력했던 것이 나의 통대 재학시절 나름의 전략이었던 것 같다. 이 전략은 통대 입학시험부터 나름 유효했어서 대학 뛰쳐나와서 프랑스어와는 담을 쌓고 2년 넘게 다른 일 하며 살다가, 회사를 또 뛰쳐나와서 짧은 입시 기간을 거친 것 치고는 단박에 입학에 성공한 것 자체가 그 증거이지. 졸업 시험도 어느 선까지는 이 전략이 유효했으나, 이게 전혀 안 먹히는게 바로 동시통역.... 동시통역을 포기하면 될텐데 내가 또 이걸 포기를 못하고, 그러면 언어 장벽을 돌파해야 하는데 이게 돌파가 가능한가 한없이 회의감이 들고, 그러면서 놓지는 못하고, 어물쩡 삭아가고 있는 것이 현 상태.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전부 순차통역이기에(부스 없이 플로어에서 동시통역 딱 한 번 해봤지만 그건 대본이 있었기에 제대로 된 동시라고 부르기는 힘들었다) 이 단점(을 미친듯이) 보완하는 것을 생략하고, 가진 장점의 극대화로 어느 정도 어필이 가능하다. 

내 장점은 (여러가지가 있지만ㅋㅋㅋㅋ 다 열거하지는 않겠다. 이건 언젠가 다음 포스팅에 기회가 되면 ㅋㅋㅋ) 회사 재직 경험이 있다는 것. 프랑스어와 하나도 관련 없는 일이었고, 진짜 한국 기업 문화라고는 없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일처리라는게 어떻게 되는지 안다는 것, 통역을 하러 가서 일을 망치는 일 따위는 당연히 하면 안되지만 내가 통역을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게 행사가 잘 되는 것이라는 마인드로 나간다는 것이다. 기자님 기자님 하면서 기자들 모시고 산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통역은 서비스업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통역사가 드러나게 되면 그 행사는 망한 것. (정말로 실수해서 망쳐서 통역사의 존재가 드러나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직까지 이런 일은 다행히 없었다...) 

젊고 예쁜 여자 데려다가 통역사로 쓰려는 마인드들 여전히 발견할 수 있지만, 그래도 나름 다들 통역사님 통역사님 하며 최소한의 대우는 해주기에 미친자들을 만날 확률 상대적으로 매우 적기에 어느 정도 상응하는 서비스를 제공해야지 <- 하는 마음이 확실히 현장에서 클라이언트들에게 잘 보이는 것 같다. 이걸 '애티튜드가 좋다'고들 이야기 해주더라. 


가진 장점을 더 키우고, 멀고 먼 단점 보완의 길을 걸어가며 버티는 것. 

이게 통번역사가 걸아가는 길이겠지. 자학과 자기성찰, 자기만족 그 중간점은 있긴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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