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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 썼던 것처럼 6주차에 한 번 실패해서 재도전했던 데에 더해 이번주 건강검진으로 8주 3회차 마지막 코스를 원래 예정보다 이틀 정도 뒤에 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첫 런데이를 시작하고 58일만에 8주 트레이닝 코스를 완수했다. 6월 중순 시작해 기록적인 폭염과 무더위를 뚫고 지나온 여름이었다. 역병 2년차의 여름을 기록할만한 사건이었다. 

25분 쉬지 않고 달리기를 한 8주 2회차를 지난 토요일에 끝내고, 화요일 오전 건강검진 때문에 월요일부터 금식을 해야했다. 월요일 저녁에 컨디션이 괜찮으면 뛸 수 있지 않을까? 했으나 나를 얕봐도 단단히 얕봤다. 월요일 오후부터 어지러워서 일조차 제대로 못하고 침대에 수시로 누워있었다 ㅋㅋㅋㅋㅋ 달리기는 커녕 현관문 밖을 나갈 수도 없었다 ㅋㅋㅋㅋㅋㅋ 건강검진 당일에는 수면내시경을 받은데다 전날 새벽에 일어나 대장약 먹고 하느라 잠도 못 잔 상태여서 병원 다녀와서 오후에 하루종일 잤다. 다음날이면 컨디션이 좀 회복되어 뛸 수 있겠지? 싶은 마음과 런데이를 시작한 이후 4일 동안 안 뛴 적이 없어서 다음 코스를 바로 이어서 뛸 수 있을까? 25분 달리기를 한 번 더 해야하는걸까? 싶은 여러 마음이 들었다. 

건강검진 다음날이 되니 전날 잘 자고 다시 먹고 싶은 걸 원하는 시간 대에 마음대로 먹을 수 있게 되자 컨디션이 곧바로 좋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며칠 사이에 날씨가 놀랍게 선선해졌다! 낮에 에어컨을 켜지 않고도 지낼 수 있었다. 몇 주만에 처음이다. 절기의 위대함은 매년 경험하면서도 매년 놀랍고 신기하다. 그래도 낮에 달리는건 아직 무리일 것 같아 저녁 달리기를 위해 늦은 점심을 먹으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달리러 나가니 초승달이 조그만하게 보였다. 6주차 중간 실패 이후 처음으로 트랙에서 달렸던 날은 보름달이 커다랗게 걸려 있었는데 초승달은 보름달이 있던 곳의 정확히 반대편 하늘에 저 멀리 떠있었다. 그날 이후로 정확히 보름이 흘렀구나 느낄 수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시간에 달리기를 하니 이런 시간의 변화도 느낄 수 있구나 생각했다. 보름 동안 지구도 달도 정해진 궤도 위를 돌았고 그 동안 나도 열심히 달렸다.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여러 가지 방편이 있는데 처음 경험해 보는 감각이었다. 500미터 트랙을 돌고 돌면서(거의 9바퀴를 돌았다!) 초승달이 점점 멀어져갔다. 

웜업 5분 걷기를 하고 곧바로 30분 달리기를 시작하는 코스였는데 트랙 첫 바퀴를 돌 때는 아직 몸에 땀이 나지 않아서 반팔 반바지 바깥으로 나온 맨살이 약간 서늘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 30분 달리기를 성공할 수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사실 15분 이상 달리기를 할 때부터 내가 어느 정도 뛸 수 있을지 몰라 늘 페이스 조절에 신경쓰면서 달렸는데 그러다보니 마지막에는 호흡이 가쁠지언정 늘 힘은 남아있었다. 그래서 1분 남았다고 알려줄 때부터 스퍼트를 올렸었다. 마지막에 더 빠른 속도로 뛰면서 내가 이거보다 더 긴 시간을, 이 다음 코스를 충분히 달릴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더 길어진 20분을, 25분을 똑같이 마지막 남은 1분에는 스퍼트를 올리면서 뛸 수 있었다. 30분 달리기를 하며 3분이 남았다고 알려줄 때부터 스퍼트를 서서히 올렸다. 마지막 1분이 남았다고 했을 때부터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렇게 1분이 지나가고 달리기가 끝났을 때 폐가 터질 것 같았고 입으로 소리를 내며 숨을 몰아쉬는데 너무 가슴이 벅차 올라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생각해 보면 이 8주 코스는 내가 매우 좋아할 수 밖에 없는 프로그램 구성이다. 기록에 연연해 하지 않고 그저 정해진 프로그램을 따라가기만 하면 골라인에 도착할 수 있다. 착실히 쌓아온 시간이 어딘가의 '끝'에 다다른다는 경험은 엄청난 성취감을 준다. 결과가 어떻든 결승 지점을 통과하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지나온 시간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비슷한 일상을 보내는 성인의 시간에서 '끝'이 있고 그 끝을 통과한다는 마일스톤은 내가 굳이 세우지 않으면 경험하기 힘들다. 런데이 앱은 내가 하나하나 마일스톤을 세우지 않아도 저 8주 24회 프로그램이 이미 잘 짜여져 있고 나는 하나하나 도장을 찍어 채워나가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그 끝은 페이스와 상관없이 30분을 쉬지 않고 달렸다는 완성감과 성취감을 선사한다. 멋진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다.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은 통대 입시 시절이었다. 퇴사 후 6개월이라는 다소 촉박한 시간이 있었고 6개월의 레이스를 꾸준히 해나갔다. 1차, 2차에 걸쳐 두 번의 시험을 보고 모든 레이스가 끝난 날,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지난 6개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다시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이상은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운 좋게 합격 통지를 받았던 날은 아마 지난 모든 시간을 돌이켜봤을 때 가장 기뻤던 순간이었다. (그 이후 불구덩이 같았던 통대 2년의 시간과 더한 불구덩이 같은 졸업 후 프리랜서의 시간은... 넘어가자 ㅋㅋ) 어제 30분 달리기가 끝나고 숨을 몰아쉬며 느꼈던 기분이 통대 입시 레이스를 끝냈던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보다 훨씬 적은 노력과 짧은 시간으로 이만큼의 성취감과 효능감을 느낄 수 있다니 (다시 한 번) 멋진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1분에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서 달리며 마라톤 선수들이 마지막 트랙에 들어와 달릴 때 갑자기 단거리 선수처럼 뛰는 모습들이 떠올랐다. 남김없이 불태워서 재가 되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몸으로 구현할 수 있다니. 장거리 달리기는 너무 멋지다. 달리기라는 인생의 좋은 메이트를 만난 특별한 여름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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