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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마지막 밤

김첨지. 2018. 11. 24. 08:55

이제 몇 시간 후면 서울 가는 장장 열 몇 시간의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오지 않을 것 같은 이 시간이 또 오는구나. 


늘 그렇듯 이번 출장에서도 이제까지 말로만 듣던 일들을 몸소 체험하였다. 그렇기에 모든 시간이 의미가 있었다. 새로운 입력이 없는 시간, 모든 것이 반복에 지나지 않는 시간을 내가 어떻게 바라볼까? 지금까지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기에 잘 모르겠다. 일단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 지금은 새로운 입력을 소화하기에만도 충분히 벅차니까. 


이번 출장 중에는 처음으로 청중이 200명이 훌쩍 넘는 연회장에서 순차통역을 해보았다. 통대에서 하던 모든 수업에서 그리도 중요했던 통역 브리프. 그것은 실제로도 중요했다ㅋㅋㅋ 어떤 행사에 어떤 청중에게 어떤 연사가 어떤 내용을 어떻게 전달하는가. 통역이 제공되는 상황에 대한 frame을 설정하는걸 통대에서는 브리프라고 했다. 회의/행사명, 연사, 청중 등을 기입하며 시작했던 통역 브리프... 여러분, 실제 상황에서 통역 브리프만도 못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청중 200명이 되는 행사 통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봐주길 바란다. (...이후 생략) 

그리고 말로만 듣던 급박한 시간에 내가 충분히 소화할 수가 없는 양의 사전 자료가 왔을 때 1/ 자료를 어떻게든 서칭해서 그걸 붙들고 실제 행사에서 on-time으로 간다 2/ 자료를 아예 갖다 버리고 쌩통역으로 한다, 두 가지 중에서 택1을 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이런 얘기는 여러 번 들었었는데, 아니 그래도 어떻게 자료 없이 통역을 해? 어떻게든 자료를 보면서 해야 하는거 아냐? 라고 생각했으나 왜 이런 말들을 했는지 또 내가 겪어보니 알겠(....) 

자세한 상황에 대해 구구절절 이곳에 쓸 수는 없지만 결국 아무 시청각 자료 없이 오롯이 연사가 하는 말에 집중해서 의미 단위로 통역하는 시간이 훨씬 더 질좋은 통역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아무 자료 없이, 최소한의 용어 습득 없이는 불가능했겠지만, 아 이래서 어느 시점에서는 자료를 갖다 버리고 ㅋㅋ 연사가 하는 말에 집중해서 통역을 하라고 선생님들이 이야기를 했던거군,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켠으로는 실제 현장은 늘, 언제나, 라고 해도 좋을만큼 이런 식으로 돌아가게 마련인데 통대에서 배운 환경대로 통역을 하겠다고 고집하는건 아닌지, 고객들은 내가 말을 했으니 너는 통역을 하라고 하는게 꼭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보다 완전한 통역을 하기 위해  정보와 자료를 요구하지만(그리고 아마도 나의 이런 태도 때문에 '프로페셔널'하게 일하려고 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는 고객 측의 피드백도 들었다. 마냥 칭찬으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고객이 원하는 것은 완전한 통역이 아니며, '완전한' 통역이란 것은 고객에게 그저 2차, 3차, 아니 두자리 차수의 관심사인 경우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하겠지만 그것이 고객의 최종 목표에 당연히 방해는 되지 않아야 하며, 이미 신경쓸 것이 많은 고객에게 (그리고 그 상황을 뻔히 아는 마당에) 나마저 짐을 지우지 않는 선에서 최선의 통번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길은 무엇인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지도. 어떤 프로젝트에 투입되든지 상관없이 걸출한 실력을 지니면 될 일이다. 적고나니 너무 간단해서 허무할 지경. 


지금은 받은 돈이 아깝지 않게 일하자는 걸 모토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걸로는 내 스스로가 갈증을 느낀다. 이 마음을 잊지 않고 싶은데 그게 또 쉽지기 않아요. 적어도 이 마음을 연말, 연초까지는 간직해 보고 싶구나. 서울 가면 새까맣게 잊어버릴지도 몰라 어떤 형태로든 이 마음을 남겨보고자 하는 할말많지만할수가없어 지웠다 썼다를 반복했다. 짐은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싸야겠다. 


안녕, 모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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