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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잡혔다가 취소된 통역이 총 4건이었다.

1건은 코이카 프로젝트로 튀니지 출장을 가는 거였는데, 코로나 상황이 다시금 안 좋아지면서 출장 인원을 절반으로 줄이게 되어 원래 통역사 두 명이 참여하는 거였다가 한 명으로 줄면서 내가 빠지게 되었다. 5월 출장 예정으로 4월 정도에 연락이 왔었는데 이때는 아직 국내에서는 의료계 관계자, 요양병원, 고령자 정도만 백신 접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정부에서는 특정 직군이 아닌 내 연령대 백신 접종은 8월 이후라고만 했을 때였고, 4월 시점에서 8월은 굉장히 먼 얘기 같았다. 백신에 대한 부작용 등으로 국내 여론이 안 좋았을 때라(뭐 지금도 안 좋긴 하지) 나도 백신을 맞아야 하나 안 맞아야 하나 고민이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출장을 간다고 생각하니 무조건 백신을 맞고 가는게 마음이 편하겠더라. 하지만 1) 백신을 맞고 싶어도 맞을 수 없었고(잔여백신 시스템이 생기기도 전이었다) 2) 결과적으로 출장이 취소되었다 ㅋㅋㅋㅋㅋ 

이후 6월 잔여 백신 접종 신청으로 얀센을 맞았다. 백신 종류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지만 1회 접종으로 끝나니 간편해서 잘 됐다고 생각했고, 접종 후 아무 이상도 없었다. 동네 의원급 1차 병원에서 접종했는데 접종 안내문에는 1월인가 2월 기준으로 작성된 아스트라제네카와 화이자에 대한 내용 밖에 써져 있지 않았다 ㅋㅋㅋ 요새는 20~40대가 모더나, 화이자 접종을 많이 하면서 접종 후 1주일 정도는 심박수 높아지는 운동 등을 삼가라는 등 더 촘촘해진 안내를 하던데 난 그런 얘기 아무 것도 들은 게 없어서 주사 맞기 바로 직전에 달리기 하고 가고, 이틀 뒤에도 평소처럼 달리기했는데도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운이 좋았던 거였겠지. 하여간 출장 건이 들어왔다가 취소되면서 백신 접종에 대한 마음가짐이 확 바뀌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취소됐던 나머지 3건은 국내에서 해외 클라이언트와 화상회의를 진행하는 거였다. 두 건은 아마도 최종적으로 요율 조율 과정에서 클라이언트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회의를 취소했다 (아마 다른 통역사를 섭외했겠지). 한 건은 에이전시를 통해서 들어온 N모사 회의였고, 다른 한 건은 통대 동기가 넘겨준 건이었다. 동기가 넘겨준 건은 가격 요율이 안 맞아서 취소되기 전에 프랑스 클라이언트가 사업 현황 점검차 한국에 입국 예정이라 그에 따른 수행 통역과 회의 통역으로 들어왔었는데 일정 직전에 비자 발급이 안 되서 못 들어온다고 취소됐다. 코시국에 나날이 다양해지는 통역 취소 사유가 아닐 수 없다. 

 

지난 1년 9개월 여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이렇게 돈을 못 버는데도 죽으란 법은 없구나, 신기하게 없으면 없는대로 살아지는구나 하는 걸 체감했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에게 손 벌릴만큼은 아니었다. 나야 수입이 없는 동안에도 기본적인 생활비 말고는 들어가는 고정비가 없으니 가능했지만, 다른 자영업자 분들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 상황이 차차 나아지고는 있지만 지금까지도 영업시간 제한으로 고통받는 분들을 생각하면 함부로 입을 놀릴 수가 없다. 내 경우 작년에는 정부 보조금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통장 잔고가 간당간당할 때 30만원이 얼마나 큰 돈으로 느껴졌던지. 작년 하반기부터는 몇 건 안 되기는 하지만 화상회의로 통역을 하기도 했고, 이런저런 번역들이 끊길만 하면 들어오고 끊길만 하며 들어와 딱 생활비만큼의 수입이 들어왔다. 작년 말부터 올 상반기 책 번역을 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초고를 출판사에 보냈고, 이번 출판 계약은 처음으로 책 출간 시점이 아닌 초고 인도 후 1달 안에 번역료를 정산받는 계약이라 코로나 이후 처음 목돈이 통장이 들어오기도 했다. 번역 과정에서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출판 번역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한 책이었다. 실제로 이후 들어온 책 번역을 고사하기도 했다. 상반기 초고를 넘긴 책은 교정 과정이 아직까지 끝나지 않아서 내년 초에 최소 한 차례 이상 역자 교정이 있을 테지만 출간 전 받은 번역료가 올해 생계에 큰 도움이 되었다. 간당간당하며 지내던 통장 잔고가 처음으로 넘실넘실해졌고 한동안 생활비 걱정은 안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주에는 역병 이후 처음으로 9주짜리 통번역 프로젝트 계약을 했다. 아직 세부 일정이 미정이지만 별탈이 없다면(한국에 들어와야 할 클라이언트가 비자 발급을 못 받는다던지 하는 일이 없다면..) 자료 번역과 통역을 마치면 대충 연말 무렵이 될 것 같다. 지난주부터 이 계약 건을 조율 중이었는데 같은 기간 기가 막히게 11월 초 2주 기간으로 튀니지 출장이 또 들어왔다. 최종 계약 성사가 된 건 아니었지만 일정이 겹치기에 튀니지 출장 건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튀니지 건도 이번에 새로 시작하는 사업이라 쭉 여러 번 출장을 갈 수 있는 건이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이 일은 꼭 없을 때는 더럽게 없다가 들어올 때는 같이 들어와서 몸이 두 개였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텅텅 비어있던 캘린더에 다른 일정이 있어서 일을 못하게 되는 일이 다시 생기는구나,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기 너무 아쉬울 정도로 내가 들어가고 싶은 프로젝트였지만 아쉬움만큼 작은 희망의 불씨를 보기도 했다. 

지난 주말에는 역병 이후 처음으로 전시회를 갔고, 인천까지 가서 무대 공연도 관람했다. 무대 공연을 보며 내 안의 생기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딱 한 번 뿐인 무대 공연을 볼 때면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감각을 지난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묻어두고 살았다가 다시 꺼내니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인간은 역시 결핍의 시간이 있어야 이후에 더 강한 강도의 자극을 받는 걸까. 

늘 만나는 사람만 만나며 살다가 최근 1~2주 사이에는 그간 만나지 못했던 여러 방면의 지인들이 만나자며 접촉을 시도해 오고 있는 것도 어느 한 시기가 끝나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잔여백신 접종, 게다가 얀센으로 1회 접종으로 fully vaccinated 되면서 그래도 마음이 편해져 그 이후에는 식당에서 외식도 하고 했던 것처럼 이제 다들 2차 접종이 어느 정도 끝나가고 하니 이런저런 만남들을 도모하는 건가 싶다. 날이 추워져 연말이 다가오고 있기도 하고, 11월로 넘어가면 정말 본격적으로 연말 모임에 대한 이야기들도 나올 것 같다. 

희망회로를 돌리다가 꺼지는 게 더 괴로우니까 정말 닥치고 닥쳐서 당장 오늘 일이 되기 전까지는 내 일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며 이 일을 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계약서를 쓰기 전까지는 물론이고, 계약서 다 쓰고 나서도 엎어지는 일도 여럿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요며칠 위와 같은 이유들로 이 터널도 정말 끝이 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드는 건 어쩔 수 없구나. 헛물 켜지는 말아야겠지만 이런 희망의 불씨만으로도 안개가 가득한 망망대해에서 얼마나 큰 빛처럼 느껴지는지 모른다. 노라 존스의 크리스마스 캐롤 앨범을 들으며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이 기분을, 비록 이 순간 뿐이고 나중에 뒤돌아봤을 때는 한갓진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구나 싶더라도, 남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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