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며칠 연차를 내고 짧게 제주도에 다녀왔다. 문제가 있던 feature를 마무리하고 다녀온 휴가였다. 노트북을 챙겨가지도 않았고, 휴가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휴대폰 알림을 신경쓰지 않아도 됐다. 프리랜서로 일한 지난 수 년 간 제대로 된 휴가를 가본 적도 없지만(비행기 표만 끊으면 일이 들어와 취소 수수료만 기십만원을 물었다), 짧게 국내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노트북을 안 들고 간 적이 없다. 한 번은 홍천인가를 가다가 이동하는 차 안에서 번역 의뢰를 받고 리조트 도착해서 내내 번역만 하다 온 적도 있다. 프리랜서를 하기 전 2년 간 다녔던 직장에서는 휴가를 가서도 한국 시간으로 오전 10시 전(!)에 데일리 업무를 해야하는 게 있었고, 두 번째 여름 휴가를 다녀온 다음 회사에 퇴사하겠다고 했지..
언젠가부터(라기엔 꽤 오래 전부터, 라고 적고 나니 거의 처음 같이 살 때부터😇) 우리집 주방 담당은 동거인인데, 두어 달 전 퇴사하고 쉬는 기간이라 요즈음은 더더욱 밥 담당이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저녁 준비가 짠- 하고 되어있고, 난 손발만 씻고 나와 밥을 먹는다. 아주 완벽한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예전에 농반진반으로 “나도 아내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 꿈이 한시적이나마 이뤄진 격이랄까. 저녁상만으로도 감격인데 매번 감동하는 또 하나의 포인트가 있다. 난 찬 음료를 안 좋아해서 한여름에도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어쩌다 찬 음료를 마셔도 얼음을 넣어마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찬 과일도 좋아하지 않아서 과일을 가급적 실온에 보관하는 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냉장보관해야 하는 ..
지난 주말 동거인이 영화 Her를 보길래 중간에 옆에서 잠깐 같이 봤다. 모두가 Chat GPT를 사용하는 세상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니 몇 년 전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가까운 미래로 느껴졌다. 남주인공이 사만사에게 지금 뭘 하냐고 묻자, 사만사가 우리를 위한 곡을 쓰고 있다며 피아노곡을 들려주는 장면이 있었다. 시놉시스를 읊어주면 AI가 영화를 만들어주는 서비스인 sora를 얼마 전 처음 보고 경악을 했고, AI가 음악을 하고 미술을 하는 건 이미 너무 현실에 깊숙하게 들어와 관련 종사자들의 법적 방어가 있을 정도다. (참고로 sora는 Chat GPT를 만든 Open AI에서 내놓은 서비스다.) 아, 원래 하려던 이야기는 이게 아닌데 자꾸 이쪽으로 흐르네 ㅋㅋㅋ 여튼 사만다가 피아노곡을 들려주며..
다시 단행본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돌아왔다. 새로운 분야로 전업을 결심하고 새로운 공부를 하느라 한동안 책이라고는 들여다보질 못했다. 주로 출퇴근길 지하철, 점심시간 식당에서 책을 읽는다. 처음에는 들고다니기 가벼운 시사주간지를 봤다가 좋은 소식이라고는 없는 기사에 신물이 나서 주간지 구독을 끊고 소설, 에세이, 비문학 등 단행본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요즘 어쩐지 손에 잡히는 건 소설 뿐이라 왜 그런지 생각해보니, 지금의 내게 소설 읽는 행위란 마치 여행과 같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나를 데려다놓는 일. 물리적 육체를 데려다놓을 수 없으니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짧은 찰나일지라도 정신과 사고를 다른데 놨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고 있구나. 너무 피곤하면 ..
6개월 동안 현생과 단절하고 메타버스에서 살다 나온 나 자신에게 보상이 필요해 공부를 시작한 초반에 비행기표만 끊어놓고 나머지는 출발 직전 닥치는 대로 숙소와 국내 교통편을 예약하고, 아무 사전 정보 없이 ㅇㄹ언니가 준 lonely planet 한 권만 믿고 떠난 여행이었다. 팬데믹 이후 첫 해외여행이자 통대 졸업 후 숱한 출장과 한 차례의 가족여행을 제외하고는 첫 해외여행이었다. 처음 가보는 나라이지만 익숙한 서유럽 도시의 풍경들, 좋아하는 지중해 음식, 상대적으로 다정한 사람들 모든 것이 좋았지만, 이 먼 곳에 오기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과 에너지를 생각하면 한동안 다시 발걸음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이제 이만큼이면 됐어, 충분해 하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혼자 ..
1. 올해의 소비: SK매직 트리플케어 식기세척기 2. 올해의 영화: 서울의 봄 3. 올해의 드라마: 넷플릭스 영 쉘든 4. 올해의 여행: 4월의 포르투갈 5. 올해의 책: 정세랑의 설자은 시리즈 1편 6. 올해의 공연: 아직 공연 볼 만큼 삶이 궤도에 오르지 못함 7. 올해의 특이사항: 작년에 시작한 인생 삼모작 준비의 첫 결실로 9년 만에 다시 회사원이 됨 8. 올해의 특이사항2: 부모님 집을 나와 독립해서 살던 첫 집인 망원동을 정리하고 경기도민이 되었다. 전입신고도 마쳐서 (서류상 새로운) 동거인이 생김 9. 올해의 특이사항3: 코로나 백신 5차 접종
실패하지 않는 사랑은 생이 다하기 전 마지막 사랑일까? 단 하나의 사랑만이 실패하지 않은 사랑이라면 그럴지도.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null, undefined, 0, 1 , multiple이 얼마나 다른 값인지 놀랄 때가 많다. 나의 현재적 사랑 외에 다른 사랑이 실패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나의 지난 선택과 삶의 단면들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 십수년 전의 모습조차도 덜 성숙한 나의 모습이고, 그때의 내가, 그때의 사랑이 나를 여기에 오게 했다고 생각해. 어느 때의 델리스파이스가, 브로콜리너마저가, 짙은이 나를 숨쉬게 한 것처럼 2023년의 음악이 궁금해 찾아본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