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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김첨지. 2021. 6. 19. 12:59

달리기라는 운동에 처음 매력을 느낀 건 하루키 아저씨의 에세이를 보면서부터였다. 언제 어디서나 간단한 운동복과 운동화만 있으면 되는 운동, 평생 꾸준히 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게 멋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작할 엄두는 안 났다. 20대 후반~30대 초반 동안 크로스핏에 푹 빠져 박스를 열심히 다닐 때도 가장 싫었던 와드 중에 체육관 바깥으로 나가서 동네 몇 바퀴를 달리는 시간이 꼭 들어갔다. 수영을 해도 등산을 해도 근육이 지치기보다 호흡이 먼저 가빠와서 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폐활량이 딸리는 내가 어떻게 달려, 두통 오는거 아냐 라는 생각에 멋있지만 어쩐지 시작할 엄두가 안 났다. 

그러다 작년 코로나 때문인지 주변에서 달리기를 시작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체육관 폐쇄로 하던 운동들을 할 수 없고, 아무래도 야외에서 하는게 실내 운동보다야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나도 코로나 이전 2019년 데카트론에 갔을 때 아주 조만간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달리기를 할 요량으로 암밴드 대신 폰을 손에 쥐고 뛸 수 있는 물건을 샀었다. 운동복과 운동화는 다 있으니까 언젠가 달리고 싶어지는 날이 오면 언제든지 바로 나가 뛰겠다는 요량으로 당장 쓰지 않을 물건을 사둔 것이었다. (집에 안 쓰는 물건 놔두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편이라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면서 마흔 전에는 달리기를 시작할 거라고 얘기하기도 했었다. 

이것이 폰 핸드밴드(?)다. 정확한 제품명 모름.

지난 달 말 500페이지 가량의 책 번역 초고 마감을 하고, 미뤄뒀던 온갖 병원 투어를 하며 이렇게 살아서는 정말 평생 병원이나 다닐 것이라는 게 정해진 미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체육관을 다닐 엄두는 나지 않았다. 코로나 전 잠깐 다녔던 실내 클라이밍만 해도 마스크를 쓰고 50분 클래스를 듣는 게 힘들 것 같았다. 수영장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달리기 준비를 한답시고 저 핸드밴드(?)를 샀을 무렵이었을까, 달리기를 예찬하는 팟캐스트를 들었을 때였을까, 언제인지 모르겠는데 내 폰에는 Runday 라는 앱이 설치되어 있었다. 설치만 되어 있고 한 번도 들어가본 적이 없었던 앱을 켜고 트레이닝 메뉴에 들어가니 1주일에 3회씩 8주 과정 프로그램이 있었다. 하루 운동량도 25~30분으로 적당했다. 총 24번 8주 과정을 끝내고나면 30분 동안 쉬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된다고 적혀 있었다. 1분도 달리기 힘들 것 같은데 30분을 달릴 수 있다고?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첫날 프로그램을 켰다. 앞뒤로 5분씩 걸으며 웜업과 쿨다운이 있었고, 본운동은 1분 달리기+2분 걷기를 반복해 총 다섯 번을 뛰는 거였다. 1분씩 다섯 번을 뛰는 거라면 살살 달리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앱의 트레이닝 코치도 절대 빨리 달리지 말고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즉 호흡을 충분히 고르면서) 뛸 수 있을 정도의 페이스로 달리라고 했다. 30분 달리기를 할 수 있으려면 페이스 조절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첫 날 달리기를 하는데 앱 조작 미숙으로 웜업 후 본운동에서 두번째 달리기를 하고 난 다음 트레이닝이 멈춰졌다. (다음날 보니 트레이닝을 하는 동안에는 화면 조작을 멈추는 잠금 기능이 있었는데 모르고 그냥 화면을 켜놓고 달리다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다시 1일차 프로그램을 돌리니 구간 별로 뛰어넘기를 할 수 있었는데 (웜업/첫번째 1분 달리기/첫번째 2분 걷기/두번째 1분 달리기 등으로), 구간을 넘겨서 하는 경우 정확한 기록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경고 문구가 떴다. 그래서 웜업 구간만 넘기고 다시 첫번째 1분 달리기부터 시작했다. 앞에 두 번 달리기를 했으니 결과적으로 첫 날 1분 달리기를 7번한 셈이었다. 6번째 달리기를 하는 때부터 기분이 슬슬 날아오를 것 같더니 마지막 7번째 달리기를 할 때는 달리는 사람들이 느낀다는 러너스 하이가 이런 건가 싶은 뽕에 차올랐다!!!!! 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초심자의 운이었고, 첫 끗발이 개 끗발인거지만 첫날 느낀 황홀한 기분은 최소한 8주 코스를 따라가기에 충분한 동력이 되어줄 것 같다. 첫 날 별다른 생각없이 운동복만 걸치고 운동화를 신고 나와 달렸는데 막상 달리다보니 스포츠 브라를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 중간부터 가슴이 위아래로 계속 출렁거리자 가슴 조직이 너무 아파 중간중간 가슴을 부여잡고 달렸다. 나의 아담한 가슴이 흔들릴 것이 있다니... 이것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ㅋㅋㅋㅋ 두번째부터는 스포츠 브라를 하고 나갔더니 괜찮았다. 두번째 과정은 첫 날 과정과 똑같은데 1분 달리기만 한 번 더 늘어서 1분 달리기+2분 걷기를 6번 반복하는 거였다. 전날 미숙함으로 이미 일곱 번을 달린지라 여섯 번은 쉽게 달리고 들어왔다. 

 

8주차까지 가봅시다

 

런데이 앱을 찬양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버스를 타기 위해 뛰어본 적을 제외하고는 뜀박질이라고는 한 적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뛸 수 있게 만들어주는구나. 빨리 뛸 필요가 없고 자기만의 속도를 유지하면 되니까 (심지어 걷는 속도보다 달리는 속도가 느릴지라도 달리는 페이스만 유지하면 된다고 한다) 각자 자기만의 출발선에서 시작하면 된다. 8주 후 30분을 달리면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그 중간중간 어떤 경험들을 하게 될 지 궁금하다. 다음주 주말에 3박 4일 지방 여행을 가는데 여행 일정이 4일이나 되다보니 여행을 가서도 최소한 하루는 달려야 한다. 처음 가보는 낯선 도시에서 달리기를 할 생각에 벌써 기대감이 차오른다. 낯선 풍경을 바람을 맞으며 느낄 수 있다니. 고작 1주차 클리어했지만 시작이 가장 힘들었으니 앞으로 쭉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가기만 하면 될 것. 이 8주의 경험이 나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잘 지켜보고 소회를 남기도록 하겠다. 

 

 

덧. 2018년 1월에 이미 이런 글을 쓰기도 했었군. 3년 반이 지나서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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