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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퇴근길 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처음 인사를 나누는 옆 팀 팀원 분과 말을 트게 되었는데, 그 분이 본인도 프랑스어 전공으로 통번역대학원을 나왔다며, 통번역대학원 입시 준비 학원에서 내 이름이 특이해서 나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깜짝 놀라서 눈이 튀어나올뻔... 통번역대학원 한불과는 외대와 이대 단 두 곳이며 이마저도 입시 학원은 딱 한 곳이어서 그 학원에서 외대, 이대를 모두 보낸다. 회사 동료 분은 나보다 1년 뒤에 이대 통번역대학원을 다니신 분인데 학원의 합격 수기를 읽다가 내 이름을 봤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진짜 오랜만에 학원 카페에 들어가서 2014년 11월에 작성한 나의 후기를 들춰보았다. 

나 자식 정말로 열심히 살았구나. 그리고 작년 하반기와 올 상반기 6개월 동안 이때와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살았구나. 지난 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나름 열심히 산 거 같은데 돈이 없는 이유는 이렇게 돈을 다 가져다 썼기 때문이구나 ㅋㅋㅋㅋ 등등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한 시절을 북마크할 수 있는 글의 존재란 소중하다는 생각도 했다. 지금 수기를 다시 읽으니 오롯이 내가 선택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나를 충만하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삶의 기조가 나의 30대의 원동력이 되었다. 

개인 아카이빙 차원에서 당시의 합격 수기를 가져다 놓는다. 


5-6월 : 시작반 
7-10월 : 실전반 및 외대 준비반
8-10월 : 구술반 

저는 학부 때 프랑스문화를 전공했고 졸업 후 바로 동대학원 불문학과 일반대학원에 진학해서 1년 반 동안 대학원을 다니다 논문학기 직전에 대학원을 그만두고 취직해서 2년 조금 넘게 일을 하다 올해 4월까지 회사를 다니고 통번역대학원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체류경험은 학부 때 6개월 어학연수, 한 학기 교환학생을 다녀온 적이 있지만 5-6년 전이라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내가 프랑스에 있었던 적이 있었나 싶은 그런 수준이었습니다. 이전에 다녔던 회사가 불어와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보니 비록 잊고 살았던 프랑스어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하루종일 공부만 하면 되는데 금방 다시 불어에 대한 감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공부를 하면서 크나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이전에 대학원 다니던 때의 불어는 이미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이라는 걸 받아들였네요. 

기본적으로 학원에서 받은 모든 텍스트들을 거의 항상 복습하는 방식으로 공부했고 한국신문은 공부 시작하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봤던 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날그날의 모든 기사를 다 읽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1면부터 마지막면까지 모두 훑어봤고 관심가는 주제나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사들은 정독하는 식으로 신문을 읽었습니다. 통역에 필요한 시사상식, 배경지식 뿐만 아니라 1차 시험인 에세이 쓰는데에도 결과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스터디는 6월부터 주2회로 같은 분과 둘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같이 했습니다. 단 한번의 트러블도 없이 같이 공부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불한/한한 스터디를 하다가 한불 한 문장씩 통역하는 스터디로 한불을 시작하고 이후에 한불 텍스트 통으로 하는 식으로 다른 분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프랑스어가 계속 편하게 나오지를 않아서 불어로 말을 못하는데 어떻게 통역을 하나 하는 고민을 마지막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가을에도 스터디 때 한불통역을 하면 녹음시간이 8-10분 정도 되는게 다반사였고 그 답답한 통역이라 부를 수도 없는 녹음을 다시 들으면서 스크립트로 풀고 틀린 부분을 점검하는 시간이 가장 고역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내가 한 통역을 듣고 푸는 과정이 꼭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스터디 마지막에는 항상 5-10분 정도 숫자 스터디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불한/한불 숫자를 다 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한국어를 불어로 숫자 바꾸는 것보다 불어 텍스트 안에서 숫자가 휙휙 지나갈 때 그 숫자를 잡는 게 더 어려웠어서 이 부분에 중점을 두고 숫자 스터디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1차 시험 끝나고 마지막 2주 동안은 하루에 두세개씩 통역 스터디를 했었는데 이때 정말 많이 늘었던 것 같습니다. 반복적인 훈련과 연습만이 정답인 것 같아요. 

그밖의 개인 공부는 구글 actualite 매일 보면서 필요한 기사들 읽으면서 스터디 준비도 하고 따로 관심있는 주제들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다른 분들처럼 팟캐스트도 종종 들었고 가끔식 라디오 dictee를 하기도 했고 초반에는 이미숙 선생님이 추천해주셨던 프랑스 영화 dictee하면서 스크립트 만드는 것도 했었는데 영화 한 편을 끝까지 하지는 못하고 중간에 접었습니다. 실전반 수업이 본격적이 되면서 기본적으로 수업 내용을 모두 소화하고 스터디 준비/복습하는 걸 중점적으로 공부했었습니다. 수업 때 다루었던 텍스트들에 나온 표현과 주제어 같은 것들은 따로 엑셀에 분야별로 단어장을 만들어서 수시로 복습했습니다.

저는 2차 시험 때 불한은 continuite territoriale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주제가 나왔습니다. 이미 이미숙 선생님이나 천형환 선생님이 시험장에 가서 선생님들이 텍스트를 읽어주지 않고 수험생을 보면서 말하듯이 얘기한다는 걸 들었는데도 맨처음에 프랑스인 교수님이 je vais vous parler de la continuite territoriale. C'est un concept politique un peu difficile mais vous allez bien comprendre.. 뭐 이런식으로 저한테 얘기를 하셔서 아.. 그렇구나 하면서 들었습니다. 처음듣는 개념이었지만 비교적 쉽게 설명해주셔서 영토의 연속성, 계속성이라고 주제어를 한국어로 잡고 뒤에 이어진 내용들을 통역했습니다. 프랑스는 본국이 있고 해외령 같은 영토들이 있어서 본국과 해외령 국민 모두에게 동일한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전기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인데 EDF에서 제공하는 전력이 프랑스 본국에 있는 국민보다 해외령에 있는 국민들에게 비싼 값에 제공될 수 밖에 없다 뭐 이런 내용의 텍스트였습니다.
불한이 끝나고 바로 최정화 교수님이 "그럼 제가 지금부터 바나나에 대해 얘기를 할게요." 하면서 시작하셔서 앞에 불한 통역도 je vais vous parler.. 여기부터 통역을 했던 거였구나 하고 그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한불 내용은 바나나를 보통 달다고 생각해서 몸매 관리를 하는 여자들은 바나나를 잘 먹지 않는데 사실 바나나가 굉장히 건강에 좋다. 비타민 등 꼭 필요한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또 설익은 바나나(초록색 바나나)나 완전히 샛노란 바나나나 영양학적으로는 동일하고 당도에도 차이가 없다. 하루에 두세개씩 먹는 게 건강에 좋다고 전문가들은 얘기한다. 바나나를 많이 먹읍시다! 이런 내용의 굉장히 일반적인 주제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수일치에서 너무너무 많이 틀린 것 같아서 시험장에서 나왔을 때는 한불에서 기본적인 문법 실수를 많이 했고 불한도 앞부분 내용을 아예 다 제끼고 통역을 했기 때문에 올해 붙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다른 분들에 비해 학원 수강이 좀 늦은 편이었고 불어가 계속 편하게 나오지 않아서 초조한 기분도 들었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할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6개월 동안 지낸 것 같습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하던 5월과 비교하면 그래도 매일매일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크로스핏이라는 운동을 작년부터 계속해오고 있었는데 집근처에 있는 체육관을 주3회 꼬박꼬박 다닌 게 수험생활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험 직전에는 주2회 정도만 운동하긴 했는데 시험보는 주에도 항상 체육관에 갈 정도로 공부하는 것만큼이나 충실하게 운동을 했습니다. 체력관리 면에서도 많이 도움이 되었고 학원에서 통역하고 털린 몸을 이끌고 체육관에 가서 악악- 소리지를만큼 운동하고 나오면 스트레스고 뭐고 아무 생각없이 잠잘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공부하면서 내 실력이 늘고 있다는 걸 구체적으로 경험하는게 힘들었는데 운동을 하면서 매일 조금씩 바벨 무게가 늘고 랩타임이 줄어들고 하는 것들이 숫자로 보이는데서 엄청난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운동도 이렇게 하면 느는데 하물며 공부도 지금 당장 가시적인 것이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분명히 나는 매일매일 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서 6개월 동안 딱히 슬럼프라고 할만한 시간을 겪은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실력 부족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은 늘 할 수 밖에 없어서 올해 시험에 못 붙을 경우 내년에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며 최종발표 전날까지 1년치 학원비와 생활비를 계산하기도 했습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내 자신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서 파악하게 되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강점은 더욱 살리고, 약점은 보완하는 전략을 짜면서 공부해 나가는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불어 텍스트가 일단 이해가 됐으면 한국어로 풀어내는 부분이 좋았어서 2차 시험 때도 불한에서 점수를 다 받자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갔었습니다. 중간에 실전반에 처음으로 올라갔을 때는 청취모의고사를 볼 때 노트테이킹하는게 너무 어려웠어서 오히려 아무것도 적지 않고 듣는 것보다 더 못듣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었는데 결과적으로 뭘 적는 것보다 '청취'와 '이해'에 계속 무게를 두고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지금 시점에서 약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가는 시간의 연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과정일 것 같구요. 

공부하는 6개월 동안 이제까지 살아왔던 시간들 중에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부하고 운동하고 삶이 계속 단순해져가는데 이 단순한 삶이 너무 좋더라구요. 피치를 올려야 할 시간은 지금부터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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