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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에 대하여

김첨지. 2019. 3. 10. 11:02

프리랜서 3년차. 선택에 선택을 거듭하는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통대 졸업 후 프리랜서를 시작하기 전부터, 회사를 그만두고 통대 입시를 결정했을 때부터, 회사를 가기 전 다니던 대학원을 중도포기하기로 했을 때부터, 학부 졸업 시절 회사가 아닌 대학원을 가기로 했을 때부터, 이보다 더 이전 시간들에서도 늘 크고 작은 선택을 통해 여기까지 왔다. 멀쩡히 가던 길 되돌아가는 손해보는 선택도 여럿 했고, 인생을 바꿀만한 선택을 어찌 보면 별 고민 없이 서슴치 않고 한 때도 있었다. 위에 쓴 굵직굵직한 결정 뿐 아니라, 그 순간에는 선택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적 있는 무수히 많은 선택과 결정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하는 선택 하나하나가 이후의 나를 만들 거라는 걸 이만큼 체감하며 지낸 적도 없다.

하지만 이 선택이라는 게 마치 세포처럼 나를 구성한다는 걸 깨달은 이후에 오히려 선택하는데 힘을 많이 들이지 않고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잘못된 선택도 여럿 했지만 분명한건 내가 그때로 되돌아간들 나는 똑같이 행동하고 똑같이 살 거라고 점이다. 시간이 지나면 명확해지는 것들이 현재적 시점에서는 불투명하다. 선택을 한다는 건 주로 무엇을 할까 하지 말까, 한다면 A를 할까 B를 할까의 문제다. (물론 양가적 선택만 있는건 아니고 다답형 문제지도 더러 있다.) 현재적 시점에서 가진 정보와 자원만으로는 둘 중 무엇을 선택하는게 더 나을지 셈을 해 보면 대충 또이또이하기 때문에 선택지 앞에서 고민을 한다. 이미 각잡고 셈을 하지 않아도 어느 한쪽이 우세하다면 우리는 고민하지 않는다. 더 우세한 쪽을 그냥 한다/ 혹은 하지 않는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기 때문에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에서는 오히려 크게 고민하지 않고 직감으로 더 끌리는 쪽으로 간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길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선택한 이후, 실제로 가보니 잘못된 길이라면 미련없이 재빨리 돌아가거나 포기한다. 이게 선택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고민하는 것보다 낫다. 물론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널 때도 있지만. 그건 그거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나를 만들어 온 선택과 결정들이 쌓여 경험이 되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소위 말하는 감이 생긴다. 감이 좋지 않으면 가지 않는다. 다 좋은 건 아니지만 가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게 직관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그랬지, 직관이라는 건 데이터베이스에 쌓여있는 무수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순식간에(=힘들이지 않고) 처리하는 과정이라고. 직관이 틀릴 때도 있지만 그 틀린 직관도 하나의 데이터로 쌓아가면 된다.

3개월 뒤의 나를 그릴 수 없이 산다는 것.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감도 안온다는 것. 한 달 전의 내가 오늘 또 카메룬 두알라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을지 몰랐으니까. 이런 삶도 있는 것이다. 내가 쌓아오고 꾸려온 삶, 심지어 잘 모르고 막연히 꿈꿔온 삶의 실체가 이것이다. 그리고 이 삶을 이어가려고 애쓰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어디에서 무엇을 할 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보다 분명한 그림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원하는 건 같은 그림을 그려갈 사람이 아닌, 각자가 그린 그림을 내밀히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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